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 생애를 나무위키에서 발췌해 봅니다. ~
1972년 부산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하여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다.[6] 이 때부터 고향인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생활했다.[7]
경기고 재학시절에는 10월 유신에 반대하여 반독재 투쟁에 참여했다. 유인물을 만들어서 배포하는 일을 하며 이 시기부터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8][9] 이 시기 다양한 책을 접하며 함석헌, 선우휘, 백기완 등 재야인사들과 만나게 된다. 당시 경기고 동기 중에는 이종걸과 황교안이 있다. 황교안은 학도호국단 연대장을 맡은 적이 있는데, 이종걸 노회찬이 반독재 유인물을 뿌리고 다닌 걸 생각하면 참 대조적이다. 또 1년 선배로는 정두언 전 의원이 있다. 나중에 박근혜 정부 말기 탄핵 정국에 "황교안 대행과 고교 동창인 점은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1976년,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학 입시에 낙방했다. 그는 곧바로 군대에 지원해 입대한다. 군복무를 마친 뒤 1979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 후 민주화운동을 계속 하던 중 광주 민주화 운동에 크게 충격을 받는다. 그는 조직화된 노동자가 앞장서야 근본적인 변혁이 가능하다는 판단하에,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그는 고려대학교 재학 중인 1982년 영등포 청소년 직업학교(현 서울산업정보학교)에서 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 등을 따서 용접공으로 현장 노동자들 틈으로 섞여들어가, 일명 '학출'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10]
노회찬은 1980년대 초중반부터 시위를 조직하고 노조를 결성한 죄로 수배되었다. 그는 꽤 긴 시간 동안 수배자 신분으로 도망다녔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노회찬은 인천, 부천의 노동조합과 노동운동 단체들을 연합하여 인천민주노동자연맹(약칭 인민노련)을 출범시키는 데 핵심 멤버로 활동한다. 이 조직은 당시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를 목표로 활동했으며, 사회주의를 표방했다. 인민노련은 당시 노동현장에 뿌리를 둔 조직 중 가장 전위적이고 가장 큰 조직이었다.
1989년, 인민노련 결성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검거된다. 인민노련 멤버들은 이 당시 법정에서 자신들을 사회주의자라고 떳떳히 밝혀 큰 파문이 일기도 했다.당시의 공판 자료를 엮은 "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 #
인민노련은 기존의 민족해방파나 제헌의회파가 너무 교조주의적이고 이상론에 머물러있다며 보다 실질적인 노동계급 운동을 표방했다. 이에 따라 인민노련은 현재 PD 계열의 원류로 평가된다.
사실 노회찬의 정계입문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이른 90년대 초반에 이루어졌다. 이는 그가 속한 인민노련의 노선 변화와도 관련이 있었다. 90년대에 들어 동구권의 붕괴와 소련 해체를 경험하면서, 이제는 제도권으로 나와서 활동해야 한다고 노선을 전환하게 된 것이다. 인민노련은 합법 정당 운동을 위해 한국 사회주의 노동당 창당위원회로 전환하게 되고, 노회찬은 진보정당추진위원회의 대표를 역임하게 된다. 진보정당추진위원회는 95년 9월 24일, 또다른 진보정당운동세력인 민중정치연합[11] 과 결합하여 '진보정치연합'으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95년에는 '반3김'을 구호로 내세운 개혁적국민정당[12] 창당준비위에 가담했다. 이 정당은 그해 10월 창당하여 꼬마민주당과 결합하여 통합민주당을 이루었다. 노회찬 역시 통합민주당에 합류하였고, 강서 을을 지역구로 총선을 준비했지만 사면복권이 안 되어서 실패. 매일노동뉴스의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원외인사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여담으로 이 당시 원외인사로 활동하던 노회찬은 <어, 그래?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대중역사서를 집필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하였다.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와 같은 책들에 비하면 그 수명은 참으로 짧았지만, 이색적인 이력.
제도권 정치를 향한 노회찬의 발길은 진보정치연합의 대표로 권영길의 대선 출마를 지원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같은 흐름은 국민승리 21과 민주노동당을 거치며 성공적으로 안착. 이후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 공천을 받고[13] 2004년 17대 총선에서 당선되었다. 여담으로 2004년 총선 선거운동전까지는 노회찬은 일반시민에겐 무명에 가까운 진보인사 a 였는데, 당에서는 노회찬의 말빨을 아주 잘 알았는지 총선때 자주 있던 각종 토론 프로에 나오며 촌철살인과 함께 일명 대중을 웃기는 유머러스한 컨셉의 토론으로 단숨에 유명인이 되었다. 뉴스, 신문에서 노회찬에 대해서 대서특필할 정도로 노회찬 신드롬이 분 것. 노회찬의 활약이 도움이 되어 원래 민주노동당 예상 비례당선권인 5-6번을 훌쩍 넘어 본인번호인 8번까지 당선이 되었다. 말그대로 스스로 멱살 잡구서 비례대표 득표율을 13%라는 경이적인 숫자로 끌어올리면서 본인도 당선된 것. 당선 이후 대중적인 인지도의 유명 진보 정치인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NL-PD 갈등이 심해지면서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진보신당 초기의 공동 당대표를 역임하였다.
2010년엔 서울시장 선거에 진보신당 후보로 출마했는데, 이때 민주당 한명숙 후보와의 단일화를 거부하고 완주한 것 때문에 일부 야권 지지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14] 그러나 민주당도 성의있게 단일화 협상을 하지 않았음이 훗날 나꼼수에서 밝혀지는데, 이때 노회찬 의원이 게스트로 출연해 밝힌 바에 의하면 민주당 쪽에서 자신에게 선거기간 동안 전화 한 통 걸지 않았다고 토로하며 물러나려고 해도 물러날 명분조차 안 주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민주당 지지자들도 이 부분에선 반성(?)한다는 모습. 무엇보다도 2년 전 선거 때는 도리어 노회찬이 민주당 때문에 패배한 것을 감안하면...[15]
만약 이때 서울시장 선거에서 한명숙 후보와 단일화에 성공하여 오세훈 시장이 떨어졌다면 훗날 박원순 시장은 아마 역사에 없었을 것이다...
이후 민주노동당과의 합당을 밀고 나가다 결국 부결되면서 심상정, 조승수와 함께 당을 탈당했고, 이후 통합진보당 창당에 참여해 치른 19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서울특별시 노원구 병) 국회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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